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이란?
‘조선왕조실록’은 1392년 태조부터 1863년 철종까지 25대에 임금들의 472년 동안 크고 작은 사건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금과 왕실의 이야기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 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문화, 종교, 풍속 법률 등 일상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총 1,893권888 책으로 이루어진 기록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조실록’이라 했으나 이것은 ‘조선’이라는 국호를 무시하고 붙인 명칭으로 정당하지 않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지시하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왜곡이 심하여 실록의 가치가 손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책의 두께가 약 1.7cm인데, 차례로 쌓아 올리면 아파트 12층 높이가 되는 양이라고 합니다. 실록을 전부 다 읽으려면 하루에 100페이지씩 읽어도 4년 3개월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은 방대하면서도 정확성과 객관성이 매우 뛰어나며,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아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제작과정
‘조선왕조실록’은 한 임금이 승하하고 다음 임금이 계승하여 즉위한 후 춘추관에서 편찬하기 시작합니다. 임금이 승하하면 춘추관에서 실록 편찬을 위한 임시 기관인 실록청을 만들고 사초, 승정원일기, 시정기, 상소문, 개인 문집 등의 자료들을 취합합니다. 사초는 사관이 임금이 말할 때, 행동할 때, 아주 사소한 사건, 희로애락까지 속기하고 초초, 중초, 정초, 세 단계를 거쳐 다시 정리한 기록입니다. 승정원은 왕명 출납을 관장하던 기구로써 매일 취급한 문서와 왕명의 전달 등을 기록한 것이고, 시정기는 정부 각 기관에서 보고한 문서 등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렇게 모인 자료들을 실록청에서 함께 의논하고 뺄 것은 빼고, 더 넣을 것은 넣어 선 왕조 실록이 만들어집니다. 실록이 완성되면 편찬에 사용하였던 자료들은 기밀 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세초(洗草)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기본적으로 사실을 시간순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사관의 평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엄격하고 공정하게 만들어진 실록을 여러 임금은 보고 싶어 했지만, 객관성과 중립성을 보전하고 사관의 독립성과 비밀을 보장받기 위해서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제도 덕분에 ‘조선왕조실록’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실록과 일기의 차이
반정 등으로 조선왕조에서 쫓겨난 임금은 ‘실록’ 대신 ‘일기’라고 불립니다. 일기의 주인공은 조선왕조에서 쫓겨난 임금이기 때문에 왕자로 강등되어 훗날 ‘군’으로 불리게 됩니다. 조선 시대에 쫓겨난 왕은 총 세 명으로 광해군, 연산군, 노산군입니다. 노산군은 문종의 아들 세조의 조카 단종입니다. 삼촌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폐위되면서 노산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후기 숙종 때 단종으로 추존되면서 노산군일기는 단종실록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보관장소
조선전기 세종 때 4대 사고(史庫)가 만들어졌습니다. 총 4곳 서울, 충주, 전주, 성주에 보관했습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주만 빼고 전부 불타버립니다. 광해군 때 다시 실록을 필사하고 추후 보완하면서 똑같은 것 5개를 만들어서 보관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보관하기 위해 춘추관,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정족산에 숨겨 놓습니다. 아쉽게도 춘추관에 보관되었던 실록은 인조 ‘이괄의 난’ 때 불타 없어지고 나머지 4편은 20세기 초 조선의 마지막까지 온전히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동경제국대학 등으로 반출되었습니다.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된 오대산 본은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타서 없어졌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정족산, 태백 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다가 이후 태백 산본은 부산광역시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었습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번역본과 원문을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