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대 왕 연산군 (1476~1506년)
외로운 세자 시절
제9대 성종과 폐비 윤 씨의 아들로 연산군은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12년 동안 왕세자 교육을 받고 1494년 성종이 사망하자 조선의 제10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연산군은 조선 최고의 폭군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산군은 어린 시절부터 포악한 성질은 아니었을 겁니다. 실록에서 연산은 세자 시절 뛰어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세자 어떻게 보면 존재감이 없는 어린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자시절 어린 나이에 어머니 폐비 윤 씨가 죽고 가족들이 자신을 멀리한다는 느낌을 받으며 매우 외로운 시절을 보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첫 번째 피바람 무오사화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세종을 닮고자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겨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였습니다. 왕과 대신들의 적절한 균형으로 정치가 순조로웠으나 이것은 자칫하면 왕권이 약화될 수도 있었습니다. 연산군은 왕권 강화를 꿈꿔왔기 때문에 대신들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연산군 즉위 1년 후 생모인 윤 씨가 사망하게 된 전말을 알게 된 이후 연산군은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와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사초’란 실록을 만들기 위한 기록입니다. 이 당시 사초 중에서도 사림의 대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계기가 되었는데, ‘조의제문’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는 글입니다. 이 글을 쓰고 김종직은 죽었는데, 1498년 그의 제자 김일손에 의해 성종실록을 만들 때 사초에 실리게 됩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은 이런 내용을 외부에 유출해서는 안 되는데 훈구파 세력에게 알리게 되면서 이것을 문제 삼아 세력을 유지하려는 훈구파와 신진 세력의 사림 간 대립이 심각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연산군은 그동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대간과 사림들을 죽이는 결과가 초래되었고 조선 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연산군의 사랑 장녹수
연산군 하면 빠지지 않은 인물은 바로 장녹수입니다. 연산군에게는 중전이 있었지만, 중전보다 장녹수를 아끼고 총애합니다. 실록에서 장녹수는 지극히 평범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녹수는 연산군보다 연상으로 연산군을 어린아이처럼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연산군은 장녹수를 매우 사랑하여 화가 나 있다가도 장녹수를 발견하면 웃음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두 번째 피바람 갑자사화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생활이 심해졌습니다. 왕은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공물의 양을 늘렸고, 공신들의 공신전과 노비 등을 몰수 하려 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은 조선의 27명의 왕 중에서 최악이었고 예를 중시하는 조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관료들은 연산군을 지지하는 파와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연산군을 지지하는 파에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 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들추어내 연산군을 자극하고 반대하는 세력을 처단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사실 폐비 윤 씨의 죽음과 관련된 자들은 훈구파가 많았지만, 무오사화 이후 생존한 사림 세력도 큰 탄압을 받았습니다. 두 차례 사화의 결과 연산군을 비판하는 여론을 막기 위해 관리들에게 신언패를 차게 하였고, 연산군을 비난하는 글이 한글로 쓰이자 한글 학습을 탄압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최악의 폭군의 최후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고 연산군을 보필하던 신하들조차 포기해 버립니다. 마지막 남아있던 신하는 내시 김처선입니다. 그는 세종대왕부터 연산군까지 왕을 모신 인물인데 진심으로 간언 하자 연산군은 화를 참지 못하고 팔, 다리를 자르고 활로 쏘아 죽이게 됩니다. 연산군의 폭정을 견디다 못한 신하들은 모의해 연산군의 파였던 임사홍, 신수근 등을 제거한 후 연산군을 폐위하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결국,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2개월 뒤 병으로 숨을 거둡니다. 장녹수를 그렇게 사랑했던 연산군의 마지막 유언은 신 씨가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중전을 그리워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