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왕 선조 (1567~1608년)
조선 최초의 방계 출신 임금 선조
제11대 중종의 손자로, 중종과 후궁 창빈 안 씨의 아들 덕흥대원군은 인종, 명종과 이복형제 사이입니다. 명종이 후계자 없이 승하하자 덕흥대원군의 셋째아들 하성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고 바로 14대 왕 선조입니다. 조선 최초로 후궁의 자녀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명종은 여러 조카 중 창빈 안씨의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아들을 아꼈다고 합니다. 이유는 덕흥대원군의 어머니인 창빈 안씨 때문인데, 중종의 다른 후궁들은 문정왕후와 대립하다 쫓겨나지만 창빈 안씨는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와 대립하려 하지 않고 자신은 낮춘 겸양 덕분에 덕흥대원군과 그의 아들들을 아꼈다고 합니다. 덕흥대원군의 아들이 총 3명이었는데 그중에 셋째 막내아들 하성군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사림의 시대와 붕당 발생
선조는 조선의 27명의 왕 중에서 4번째로 즉위 기간이 긴 왕입니다. 그래서인지 선조 시기에는 많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사림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림은 제9대 임금인 성종 시기에 중앙에 등용되었지만, 연산군 때부터 명종까지 4번의 사화를 거치며 많은 사림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명종 말부터 사림들은 다시 중앙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고 이황, 조식, 성혼, 이이를 중심으로 학파가 결성되어 더욱더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 후 사림 세력은 학문적, 정치적 견해 차이 때문에 둘로 나뉘게 됩니다. 제일 먼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유는 ‘이조전랑’이라는 관직 때문입니다. 이조전랑은 조선시대에 관직 중 하나로 높은 관직은 아니지만, 인사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앉고 싶은 관직이었습니다. 이 관직 자리를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 두 사람이 대립하게 됩니다. 처음에 김효원은 젊은 관료로서 장원급제 출신이고 학문의 깊이가 깊어 이조의 정랑으로 임명됩니다. 이때 심의겸이 반대하고 나서는데 심의겸은 명종 때부터 관료 생활을 한 인물로 “김효원은 과거 윤원형에게 얹혀살던 사람으로 행실이 올바르겠냐”라면서 공개적으로 비꼬아 반대했습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효원은 이조전랑 관직에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끝이 나지 않고 이조전랑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거론되면서 김효원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김효원과 심의겸은 서로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이들의 중심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됩니다. 김효원이 사는 곳이 동쪽, 심의겸이 사는 곳이 서쪽이라서 동인과 서인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16세기 최대 전쟁, 임진왜란 발발
16세기 말 조선은 건국 이후 200년 동안 직접적인 전쟁이 없었고 평화가 계속되다 보니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일본은 100년 동안 전국시대를 거치며 군사력을 키웠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총을 수입하면서 전국시대를 통일하게 됩니다. 100년 동안 전쟁만 해오던 일본은 통일로 평화가 찾아오자 직업군인이던 많은 사람들이 실직자가 되고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외로 눈을 돌립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관심이 없었고 명나라를 점령하여 일본의 사무라이에게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조선을 통과해야 했고 병참 기지화 해야 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간첩을 보내 조선의 정황을 살펴보도록 하고 도로를 조사하며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조선에는 전쟁을 준비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고 군대를 준비해야 하는데 세금을 걷어서 준비했다가 전쟁이 발생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원성을 들을까 아무도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홀로 전쟁 준비를 하던 사람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입니다. 이순신 형의 친구였던 류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수사라는 관직으로 승진하게 됩니다. 1952년 일본은 부산 공격을 시작으로 동래성 전투를 치르고 한양으로 올라가던 중 충주에서 조선의 군대와 만나게 되는데 조선의 군대는 일본의 군대에 비해 형편이 없었습니다. 조선의 조정에서 매우 신뢰하였던 장수 신립은 군대가 섬멸하자 남한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습니다. 왜군은 저항 없이 한양까지 오게 되었고, 선조를 잡고 왕을 볼모로 조선의 군사를 모아 명나라를 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선조는 도망간 이후였습니다.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한양을 떠나 옮겨 다니며 피신했습니다. 왜군들 입장에선 선조의 도망이 상상도 못 했던 일입니다. 일본은 작은 성주라도 전쟁에서 질 위협에 처하면 할복하거나 항복하지 절대 도망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이 도망갔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알고 분노했고 경복궁으로 가서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궁궐도 불태웁니다. 일본은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조선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여러 가지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선조의 비겁함을 몰랐고, 여진족의 존재를 몰랐고, 이순신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물자 보급인데 이순신은 물자 보급로를 끊어 전세가 역전됩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명나라와 일본은 교섭을 시작하는데 무례한 협상 요구 조건으로 결렬되고 다시 전쟁이 시작되는데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이순신은 7년 동안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도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 23전 23승의 승리를 이끕니다.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유언을 남기고 순국합니다. 선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못지않게 이순신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여기저기 피난을 다니고 있는데 이순신은 백성을 위해 싸우고 영웅이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 후 국토는 황폐해졌고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사람에게 상을 주어야 마땅했지만, 선조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전쟁 승리의 모든 공을 명나라에 돌렸습니다. 선조는 비겁하고 책임감이 없는 왕으로 조선 최악의 군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