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대 왕 인조 (1623~1649년)
인조와 서인 정권의 반정
인조는 제14대 왕 선조의 손자로 선조와 후궁 인빈 김 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의 첫째 아들입니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이름은 능양군이며 광해군과 인조는 삼촌과 조카 사이입니다.광해군은 왕위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새어머니 인목대비를 덕수궁에 가두었는데 광해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과 같은 후궁의 자녀들에게도 적개심을 보입니다. 당시 정원군의 집터가 왕의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말을 듣고 그 집안을 풍비박산 내버립니다. 이후 인조(능양군)의 동생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자결하고 아버지 정원군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능양군은 광해군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던 중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반대하는 서인세력과 힘을 합쳐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인조는 왕위에 오른 후 친명배금 정책을 했는데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후금을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조선에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이괄은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인들은 이괄의 공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배척하고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인조의 총애를 받던 서인 김유와 이괄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조반정 이후 논공행상에서 이괄은 김유보다 낮은 등급을 받게 됩니다. 이괄의 정적인 김유는 계속해서 이괄을 견제하고 이괄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모함을 만듭니다. 화가 난 이괄은 아들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를 살해하고 군대를 이끌고 난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부하의 배신으로 세력은 무너지고 후금으로 도망가 조선을 침공하자고 부추기게 됩니다. 후금은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합니다.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고 후금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지 않을 테니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그리고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합니다.
인조의 삼전도 굴욕 병자호란
후금은 점차 세력을 키웠고 조선에게 양국관계를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명합니다. 그리고 힘을 키워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더욱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조정에서는 두 파로 나뉩니다. 척화론자와 주화론자로 나뉘게 되는데 결국 조선은 청을 배척하는 척화의 입장을 선택합니다. 이 사실을 청나라가 알고 제대로 쳐들어왔으니 그것이 병자호란입니다. 인조는 식량을 옮겨놓은 강화도로 도망가려 했지만 청군이 길목을 차단하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가게 됩니다. 결국 인조는 항복할 것을 선택하고 잠실 고수부지로 끌려가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3번 숙이는 것을 3번, 총 9번을 청나라 황제에게 절합니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갑니다.
비정한 아버지 인조
인조는 무능하고 비겁한 것이 선조와 닮았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드러난 자신의 무능력함을 아들에게 질투로 표출합니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동생 봉림대군은 심양에서 8년 동안 인질 생활을 했습니다. 그 어려운 환경에서 농사를 짓고 다양한 교류를 통해 외교관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아들 소현세자가 인조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인질 생활에서 완전히 풀려나 귀환한 소현세자 부부를 아무도 반기지 않고 위로의 말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죽습니다. 소현세자의 장례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누구라도 그의 죽음을 의심하면 인조는 크게 꾸짖었습니다. 소현세자가 죽고 세자빈과 세 아들은 인조의 냉대를 받습니다. 결국 세자빈은 사약을 내리고 자신의 손자였던 세 들은 유배 보냅니다. 그리고 차남이었던 봉립대군을 세자로 앉히고 그가 제17대 임금 효종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