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500년

제19대 왕 숙종 (1623~1649년)

1- 2021. 10. 7.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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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금수저, 3대 적통자 숙종

18대 임금 현종과 명성왕후 김 씨의 적장자이자 외아들로 14세에 왕위에 오릅니다. 현종은 조선의 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고 왕비도 한 명만 둔 왕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숙종에게는 이복동생들이 없고 현종의 자녀 1 3녀 중 유일한 아들이자 장남이었습니다. 숙종은 6세에 세자에 책봉되고 14세에 왕위에 오를 때까지 순조로웠습니다. 보통 20세 이전에 왕이 되면 수렴청정을 하는데 숙종은 바로 정치를 시작합니다. 3대에 걸친 적통자로서 역대 왕 중에서도 입지가 단단한 상황에서 숙종은 어린 나이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대범하게 정치할 수 있었습니다.

 

 

원로 송시열을 누른 젊은 임금

숙종은 불같은 성격이었으며 온몸에 화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성격도 아주 괴팍하여 어머니인 명성황후도 못 말릴 정도였습니다. 숙종 자신도 몸에 열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숙종은 어릴 때부터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 1674 2차 예송, 갑인예송이 있었던 해였습니다. 집권 여당인 서인과, 야당인 남인이 효종의 비가 죽자 자의대비의 상복을 입는 기간으로 다투었습니다. 서인은 9개월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1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서인들은 효종이 차남이었기 때문에 9개월을 입어야 한다고 했고, 남인은 숙종의 할아버지인 효종을 왕으로 인정하여 1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숙종은 괘씸하게 여겨 서인이었던 송시열에게 예를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하며 귀양을 보냅니다. 송시열은 인조-효종-현종-숙종까지 4대에 걸친 서인파의 원로입니다. 즉위한 지 1년도 안 된 소년 군주가 정치 원로를 귀양 보내면서 아버지 현종과는 다른 강단과 대범함을 보여줍니다.

 

번의 환국시대 

숙종 때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정치싸움으로 발생한 4번의 환국이 있었습니다. 숙종이 집권하고 갑인 예송으로 서인이 여당에서 물러나고 오랫동안 야당이었던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숙종은 남인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그렇지 않았고 숙종은 남인들의 군기를 잡아야겠다고 벼르던 중 사건 하나가 발생합니다. 어느 날 영의정이었던 허적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앞마당에서 잔치를 열게 되었는데 갑자기 비가 오자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기름 친 천막을 허락도 없이 가져다 쓰게 됩니다. 이를 알게 된 숙종은 몹시 화났고 허적의 뒤를 캐보니 허적의 아들 허견이 아버지의 위세를 믿고 뇌물을 받는 등 문제를 자주 일으켰고 역모를 꾀한다는 소문을 숙종이 듣게 되었습니다. 허견의 역모죄로 남인들이 의금부로 끌려오고 남인의 핵심안물 이었던 허적과 윤휴가 사사됩니다. 남인의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의 시대가 오고 처음으로 발생한경신환국입니다. 이 사건의 해결을 두고 대립이 생긴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됩니다.

숙종의 첫째 부인은 천연두로 사망하자 서인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가 왕비가 되었고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남인 세력은 조선 최고의 미녀인 장옥정을 이용하여 숙종의 환심을 사도록 했고 숙종의 후궁이 되어 아들을 낳게 됩니다. 숙종이 즉위한 지 13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고 너무 기뻐 태어난 지 2달 만에 원자로 삼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에 서인들은 왕비인 인현왕후의 나이가 아직 어리고 후사를 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이유로 반대합니다. 이에 노발대발한 숙종은 귀양 갔다가 복직했던 83세의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보내고 결국 사약을 내립니다. 서인들은 줄줄이 귀양 보내졌고 남인 세력을 복직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입니다.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는 폐비가 되어 쫓겨나고, 후궁이었던 장희빈이 중전이 됩니다.

장희빈의 외모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세월을 이길 수 없었고 왕비가 된 장희빈은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고 방자하게 행동하자 숙종의 마음은 점점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숙종에게 새로운 여인이 등장하니 무수리 최 씨입니다.인현왕후의 직계 몸종이었던 최 씨는 숙종의 환심을 얻어 아들을 낳고 숙빈이 됩니다. 장희빈에게서 멀어진 숙종의 마음을 눈치챈 서인들은 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했고 다시 인현왕후가 왕비에 오르게 되니 이것이갑술환국입니다. 서인이 다시 집권했고 장희빈은 중전에서 강등되어 사시 후궁 희빈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희빈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숙종의 총애를 되찾기 위해 인현왕후의 죽음을 바라는 저주를 내립니다. 인현왕후는 다시 왕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 밝혀지면서 숙종은 장희빈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합니다. 그렇게 조선 제일의 미녀 장희빈의 파란만장했던 삶은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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