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대 왕 정조(1776~1800년)
역적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이산은 21대 임금 영조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사도세자이고 어머니는 혜경궁 홍 씨입니다.정조가 11세 되던 해 사도세자가 노론 세력 힘으로 뒤주에 갇혀 죽었습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세자의 신분으로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뒤주에 가두기 전 일반 평민 신분으로 폐했고, 왕을 죽이려 했다는 죄를 물어 역적으로 몰아 죽였습니다. 따라서 아들 이산은 역적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산은 세손의 지위를 잃고 궁 밖으로 쫓겨납니다. 하지만 영조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자가 필요했습니다. 역적의 자식을 후계자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하여 왕세손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영조는 세손 이산을 무척 아끼고 예뻐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와는 달리 영조의 기대에 부응했고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노론 세력은 계속 불안에 떨었습니다. 10년 넘게 세손 수업을 받으면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일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조가 왕이 된 그 날, 정조는 그동안 마음속으로 품었던 말을 선언합니다. “과인은 사도제자의 아들이다” 노론 대신들은 죽임을 당할까 무서워했습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작업을 했습니다.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자신이 거주하는 창경궁과 마주 보는 자리에 사당인 경모궁을 조성했습니다.
정조의 업적
1) 탕평책: 정조 즉위 당시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정치 세력은 두 세력으로 분열되어 어지러운 시기였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이 당연하다 생각했던 벽파와 그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던 시파였습니다. 노론은 대부분 ‘벽파’였고 남인, 소론, 노론의 일부와 서얼은 ‘시파’였습니다. 정조는 당파와 관계없이 능력을 중시한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시파뿐만 아니라 정적이었던 노론 세력도 고루 등용하여 탕평책을 추진하였습니다.
2) 규장각 설치(1776년): 규장각은 본래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가지는 기구로 창덕궁에 세워졌습니다.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책을 추진하고자 했던 정조는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야 했기에 당파와 관계없이 유능한 청년 학자들을 모아 규장각에서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정조는 여기에 비서실 기능과 문헌 기능을 통합적으로 부여하고, 과거 시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까지 부여하여 학술 연구 및 개혁정치의 중심 기구로 육성하였습니다. 서얼 출신도 차별 없이 등용하였는데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하였습니다.
3) 초계문신제 시행: 초계문신이란 규장각에 소속되어 재교육을 받은 어린 문신들을 말합니다. 정조는 세손 때부터 닦은 학문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스스로 초월적 군주를 자처하였습니다. 초월적 군주로서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37세 이하의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여 정조의 정치 철학을 주입하였습니다. 37세 이하의 고위 관료를 제외한 것은 그들 중에 노론 세력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곧 정조가 지향하는 정치가 노론 중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장용영 설치(1785년): ‘장용영’은 정조가 왕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국왕 친위부대입니다. 장용위로서 설치되었다가 장용영으로 고쳤습니다. 정조는 장용영을 설치함으로써 붕당 세력의 기반이었던 기존의 군사체제인 5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하고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뒷받침하는 자신만의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후 폐지되었습니다.
5) 신해통공(1791년): 조선 시대에는 상인을 크게 시전 상인과 난전상으로 나눕니다. 시전상인은 허가받은 상인으로 세금을 내는 대신 군대를 면제해주고 주요 상권에 점포를 얻게 해 주었습니다. 무허가 노점상 같은 상업활동을 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시전 상인이 우세했는데 후기에 상업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상황이 바뀌어 사람들은 난전 상인들에게 물건을 사게 됩니다. 이유는 시전상인은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같은 물건이라도 값이 비싸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전상인들은 난전 상인을 단속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고 ‘금난전권’을 얻습니다. 정조는 백성들의 상업 활동을 자유롭게 보장하고 재정 수입을 늘리고자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 정책을 실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