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개월 짧은 재위 기간, 징검다리 왕
예종은 7대 왕 세조와 정희왕후 윤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해양대군으로 불리다가 첫째아들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1468년 세조가 승하하고 예정의 나이 19세 성년이 되기 전 왕위에 오르게 되자 어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합니다. 예종은 1460년 11세에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한 씨와 혼인하고 이듬해에 아들 인성 대군이 태어나면서 12세에 최연소 아버지가 됩니다. 그러나 장순황후가 아들을 낳고 산후병으로 사망했고, 아들 인성대군 또한 3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합니다. 둘째 부인으로 한백륜의 딸 안순왕후와 혼인해 아들 제안대군을 낳았습니다.
세조 재위 기간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함경도 출신을 수령으로 임명하는 것을 제한하고 한양 출신으로 대체하며 지방 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 감독을 강화했습니다. 지방민의 이주 또한 제한하게 되면서 함경도 출신 유력자 이시애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동원하여 대항했지만, 왕족 출신 군인 남이에게 진압당합니다. 이시애의 난 이후 성장한 세력을 ‘신공신’이라 하고, 한명회, 신숙주 등은 기존 세조의 측근으로 ‘구공신’이라 하였는데 세조는 구공신과 신공신의 세력다툼을 걱정하여 원상제를 실시했습니다. 원상제란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재상들이 임금을 보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당시 한명회, 신숙주 등이 예종을 보필하게 됩니다. 예종은 세조와 같이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지만, 결과적으로 신권이 강화되고 왕권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 됩니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했던 남이는 세조 재위 기간 활약하며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조 승하 후 예종이 즉위하자 훈구파는 남이가 병조판서에 적당하지 못하다 주장했고 예종도 평소 남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상황에서 직위에서 해임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이는 숙직 중 밤하늘의 혜성을 보고 “혜성이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다”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어 역모죄로 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고문 끝에 결국 남이는 자백하고 사형당합니다. 이 사건을 ‘남이의 옥’이라 하고 이를 통해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들이 제거되었으며 구공신의 시대가 다시 열립니다. 예종 재위 시기 신하들 간의 세력다툼이 있었고 예종은 세조처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재위 13개월,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승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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