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원만하지 않았던 외교 문제 ‘표전문 사건’
조선은 원나라 명나라 교체기에 원만한 외교 관계를 맺으려고 했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표전문은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공식문서 표문과 황태후, 황후, 황태자에게 보내는 전문을 합쳐서 말합니다. 전통적으로 조선의 사신이 왕래할 때 중국에 바쳤던 것입니다. 전근대 시기에 국가 간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의례인데, 그 당시 표전은 표전의 사소한 글자로 전쟁까지 일어날 수 있는 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표전문제는 조선 건국 초기 정도전이 작성했던 표전문의 글귀가 예의에 어긋났다고 명에서 트집을 잡아 조선의 사신을 억류하고 정도전을 잡아 오라고 명하며 발생한 양국 간의 불화 사건입니다.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중국의 황제로부터 고명과 금인을 받음으로써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았는데 명나라의 홍무제가 조선을 견제했기 때문에 쉽게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명나라 역시 신생 국가였기 때문에 외교 문제로 민감했고 조선이 여진족과 제휴해서 명나라를 공격할까 노심초사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명나라의 태도에 조선의 심기도 불편했습니다. 결국 정도전은 태조의 지원으로 진법 훈련을 강화하며 요동 정벌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요동 정벌에 필요한 군사력을 보충한다는 명분으로 정적이던 이방원의 사병을 몰수하려는 계획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정도전의 계획은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으로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비극, 1차 왕자의 난
태조는 2명의 왕비와 4명의 후궁 8남 5녀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이방원은 정도전,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만큼 아버지의 조선 건국을 도운 개국공신입니다. 하지만 이방원은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왕위 계승도 막내에게 빼앗긴 것이 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됩니다.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명분은 정도전이 첫째 왕비 신의왕후 한 씨 소생을 왕자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원은 자신의 사병을 일으켜 정도전을 제거하고 이복형제인 이방번, 이방석까지 제거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아끼던 신하와 두 아들을 동시에 잃고 크게 좌절하였습니다.
끝나지 않은 싸움, 2차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는 1차 왕자의난 이후 왕위를 정종에게 물러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고 2년 뒤 1400년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는데 이는 동복형제,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과 다섯째 아들 이방원 간에 갈등으로 발생합니다. 2차 왕자의난은 ‘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으로 불리는데, 1차 왕자의 난 때 큰 공을 세웠던 박포가 논공행상 과정에서 생각했던 대우를 해주지 않자 불평을 하다가 결국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에 왕위를 계승에 야심을 가지고 있는 넷째 이방간에게 접근하여 이방원이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말하게 됩니다. 넷째 이방간은 그 말을 믿고 사명을 동원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결국 이방간과 박포 두 사람은 체포되었고, 차마 자기의 친형을 죽일 수 없어 이방간은 유배 보내고, 박포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는 인간적인 도리도 있었겠지만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복형제를 죽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형제를 죽이는 모습으로 백성들의 민심을 잃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이방원을 반대하는 세력은 거의 없어졌고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이방원의 권세가 드높아졌습니다. 정종의 입지는 더 좁아져 왕위에 있을 수 없게 되자 2대 왕 정종은 상왕 태조 이성계의 허락을 얻어 이방원을 왕세제로 책봉하고 곧 왕위를 이방원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가 제3대 왕 태종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쓸쓸한 말년
왕위를 둘러싼 자식들의 권력 싸움에 회의를 느낀 이성계는 함경도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증오하였지만, 이방원은 오히려 예의를 갖추어 효도했다고 합니다. 이방원은 이성계를 한양으로 모시고 오기 위해 매번 차사를 보내지만, 이성계는 차사를 모두 죽여서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 나온 말이 ‘함흥차사’로 오늘날에는 소식이 없거나 회답이 오지 않을 때 쓰는 말입니다. 이성계는 끈질긴 설득 끝에 한양으로 돌아와 태상왕 자리에 있다가 74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조선왕조500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7대 왕 세조 (1455~1468년) (0) | 2021.10.06 |
---|---|
제4대 왕 세종 (1418~1450년) (0) | 2021.10.06 |
제3대 왕 태종 (1367년~1422년) (0) | 2021.10.06 |
제1대 왕 태조 이성계 (1932~1398년)(1) (0) | 2021.10.06 |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 (0) | 2021.10.05 |
댓글